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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자료, (2020)
pp.45~57

- 헤라클레스의 기둥, 문학번역가의 과제 -

류재화

(번역가, 불문학, 전(前) 출판기획인)

가는 작품으로 말하지 작품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처럼, 번역가도 번역으로 말하지 번역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만일 번역가가 번역에 대해 말하기를 다소 꺼린다면, 번역 에 대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번역에 대해 실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이 많기 때문이다. 번역자는 온전히 ‘되말해지지’ 않는 괴로운 상실감에 목놓아 우는 자이다. 번역은 고통이자 희열이며, 불가능성이자 가능성이며, 구속이자 자유이기 때문 이다. 그런데 번역가를 오로지 번역으로만 말하는 자들이 또 있다. 바로 출판사에서 번 역 출판의 실무를 맡는 사람들이다. 가령, 어느 문학 전문 출판사의 편집인은 사석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5명의 1 급 번역자를 찾기 위해 50명을 실패한다.” 출판사는 번역자를 섭외할 때 추천 및 소개를 받기도 하고, 기존의 번역 이력 및 내외 지명도, 평가도 등을 수렴하거나 그동안의 시행 착오를 거쳐 출판사 내부의 축적된 정보를 활용, 번역자에게 작품을 의뢰하지만, 결국 최종 마감된 원고를 통해 다소 가혹한 무언의 평가가 이루어진다. 대외적인 용어가 아닌 내부적으로 통용되는 그들만의 언어를 빌려보자면, 1급이 있고, 2.5급이 있고, 3.5급이 있다. 0.5가 붙는 다소 이상한 급수이지만, 일종의 유보조항이다. 주관적 사항이므로 약 간의 여지를 두는 심리적 변수인 것이다. 2.5급은 어쩔 수 없이 번역투가 남아 있어 일 정 부분 교정과 윤문이 예상되는 경우다. 1급은? 바로 문장가의 번역이다. 1급의 번역자 는 시인, 소설가, 작가 그 이상의 문장가로, 독자로 하여금 ‘문체’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자이다. 좋은 번역과 좋은 번역가를 정의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뚜렷한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 이견과 각기 다른 취향이 있을 수 있다. 번역학 및 번역 담론에 서 여러 차원의 논의가 이루어지고 연구되고 있지만, 여기서 말해보고자 하는 것은, 번 역출판의 현상황 및 현장에서 요구되는 좋은 번역의 실질적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다(☞출판 현장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를 일 부 예시하고자 한다). 번역을 더 의뢰받는 자가 있고, 덜 의뢰받는 자가 분명히 있다. 번역 이론 및 번역 담 론의 차원을 뛰어넘어, 국내에서 출간되는 번역물의 양과 질을 책임지는 것은 결국 번역 가와 편집자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독자에게 책이 공급되기까지의 생 산 현장에서는 번역가와 편집자가 원서 검토, 초교, 재교, 역교 등 지난(至難)한 과정을 통해 서로 보완하고 공조하고 때로는 논쟁하고 길항하며, 결국 좋은 번역을, 아니 원저 자 및 원문의 존재감을 완전히 잊게 할 정도로 홀로, 스스로, 완전한 독립체로 제 존재 감을 뽐내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 좋은 번역가가 되기 위해, 이른바 1급 번역가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답 은 여러 수행과 ‘읽기’ ‘번역하기’ ‘쓰기’라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세 개의 운동이자 세개의 세계를, 그러니까 세 개의 직업을 살아내면서 스스로 연마하는 것이지만, 번역 작 업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우리를 안내해줄 이정표와 같은 메타포를 다시 한번 환 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다. 헤라클레스의 12 역사를 상투적으 로 흔히 번역자의 고된 일에 비유하지만, 단순히 노역이라서만은 아니다. 헤라클레스가 수행하는 일을 그 동사와 목적어에 주목하다 보면 여러 상상적 유추를 해볼 수 있다. 헤 라클레스는 ‘퇴치하고’, ‘청소하고’, ‘생포하고’, ‘데려오고’, ‘훔쳐오고’, ‘열매를 따고’, 괴 력을 이용해 ‘산줄기를 없애고’, ‘파괴한다.’ 번역은 창조하기가 아니다. 번역은 창조적 파괴다. 헤라클레스의 12 역사 중 압권이 헤라클레스의 기둥 장면인 것은 우리의 이 영 웅이 거의 ‘도착적으로’ ‘창조적으로’ 파괴하기 때문이다. 놀리메 프란게레(Noli me frangere). 날 부스러뜨리지 마. 아니, 날 부스러뜨려 줘! 히드라처럼 잘리면 계속해서 나오는 머리는 잘라내야 하거나, 멧돼지 같은 야생적인 것은 죽이지 말고 생포해야 하거나, 암사슴처럼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 역시나 절대 죽이 지 말고 생포해야 한다. 만일, 히드라는 살려두고, 멧돼지와 암사슴은 죽이는 번역이라 면? 만일 문학적 번역투와 기본기 안 된 번역투를 구분해야 한다면? 무엇이 멧돼지이고 무엇이 암사슴인지부터 알아보는 번역가로서의 견습은 필수 불가결하다. 모리스 블랑쇼는 “헤라클레스가 바다의 양안을 한꺼번에 움켜잡은 것처럼 그에 버금 가는 기동하는 강력한 통일력으로 두 언어를 보란 듯이 거만하고 의기양양하게 근접시 킬 때 비로소 번역은 자신의 당당한 의무를 다한 것이고,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라고 강 조한다. 블랑쇼가 번역자에게 요구하는 길은, 말라르메처럼 “시구를 파면서도” 프루스트 처럼 “솟아올라” ‘전혀 다른’(autre) 차원의 세계를 만들라는 신성한 주문일 수 있다. 그리고 여기 한 번역가가 있다. 스베틀라나 가이어. 역사에 의해 삶이 송두리째 뒤흔 들렸으나, 문학에 의해, 번역에 의해 삶이 전이된 자. 우크라이나 키예프 태생으로, 스탈 린 대숙청 기간 처형당한 아버지와 고향을 뒤로 하고, 독일로 피신한 그녀는 도스토예프 스키의 전작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그녀는 번역이 “송충이가 지나가는 것처럼 왼쪽에 서 오른쪽으로 옮겨가듯” 옮기는 일이 아니라, “전체”를 옮기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 런데 이 ‘전체’(ensemble)란 차이를 추구하면서도 차이를 거의 도착적으로 제거하려고 하는 이른바 거의 투쟁에 가까운 다르마의 길을 겪은 후, 마지막 기적처럼 몰려오는 파 도의 기동성(起動性)에 다름아닐 것이다. 스베틀라나는 이 ‘전체’를 번역하는 문제를 가령 이렇게 비유한다. “Levez le nez en traduisant.” 이 문장을 직역하면, “번역을 할 때는, 코를 들어라”이다. 그러나 바로 이 런 직역이야말로 함정이다. 만일 원뜻을 정말 잘 번역하고 싶다면, 이 문장을 깊이 들이 마신 후 천천히, 서서히, 그리고 이윽고 기동하듯 완전한 숨을 내쉬기를. 영화의 한 장 면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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